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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스패치> 제호 속에 숨은 다른 뜻?
    기자들 떠들다/scoop desk 2011. 5. 9. 01:59


    <어디요?> 새로운 매체를 만들면서 각오한 바 였지만 취재를 위해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몇번씩 <디스패치>란 이름을 외쳐대야 한다.

    세상에서 이름의 중요성이야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특히 매체에게 있어 이름은 시작과 끝을 함께 해야하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영어로? 그것도 쉽지 않은 단어를? 썼을까.

    매체이름을 두고 무척 고민했지만 목표는 분명했다. 무슨 무슨 뉴스라는 획일성만은 피하고 싶었다. 고백하건데 <디스패치>란 제호를 염두에 둔 것은 지난해 여름 미국 취재를 갔을 때 만났던 여기자의 소속매체가 <콜롬부스 디스패치>였기 때문이다.

    30년 가깝게 지역신문에 몸담으며 법원과 검찰을 출입했다는 법조전문 기자인 그녀를 보면서 과연 나도 저렇게 반듯하게 기자로 늙어갈 수 있을까라고 반문해 보기도 했다. 이후 창간을 준비하며 <디스패치>란 단어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찾아보면서 더욱 더 그 뜻에 반하게 됐다.

    (특히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내다[파견하다] / (편지・소포・메시지를) 보내다[발송하다]

    이만큼 매체에 걸맞는 수식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보다 다른 뜻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신속히 해치우다[처리하다] / (구식) 죽이다, 처치하다

    뉴스는 하루하루 치열할 수밖에 없다. 특히 트래픽을 위해 너도 나도 연예뉴스에 뛰어들고 있는 온라인 미디어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디스패치>란 이름을 수없이 되뇌면서 힘을 얻는 것은 후자의 뜻에서 결연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디스패치>에는 더 깊은 사연도 있다. 한번이라도 이 단어를 검색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퓰리처상의 기원이 된 매체의 이름에도 등장한다.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예나 지금이나 언론의 속성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왜 갑자기 제호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 놓고 있는지. 아마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새벽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디스패치>가 한번 말해도 아는 정도가 되려면 수만번 아니 그 이상 입에 달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보다 더 빠른 길은 특종, 단독기사는 당연한 것이고 좋은 뉴스, 양질의 뉴스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조지프 퓰리처는 '퓰리처상'의 기원인 미국의 신문인.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지를 사들여 《포스트 디스패치》로 개재하여 경영에 성공하였고 《뉴욕 월드》를 매수하여,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등으로 전미국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였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헝가리 출생. 1864년 미국으로 건너가, 1868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독일어 신문 《베스틀리헤 포스트》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1869년 미주리 주의회(州議會) 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얼마 후 자기가 몸담았던 신문사 경영자가 되었다. 1878년에는 파산 직전의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지(紙)를 사들여, 《세인트루이스 포스트》와 합병하여 《포스트 디스패치》로 개제(改題), 경영에 성공하였다.
     
    1883년에는 다시 《뉴욕 월드》를 매수하여,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등으로 전미국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허스트의 《모닝 저널》과 맹렬한 경쟁을 전개, 양자의 센세이셔널리즘은 후세에 ‘옐로저널리즘’이라는 악명(惡名)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1890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마침내 시력(視力)을 잃었고, 1906년에는 ‘자유호’라는 배를 타고 유랑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1903년 6월 컬럼비아 대학에 저널리스트 교육을 위한 기금으로 2만 2000달러를 기증하여 신문학부를 창설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doopedi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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