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갔다가 누군가 놓아둔 송기원의 시집 <저녁>을 뒤적이게 됐다. 하필 화장실에 왜 이 시집을 놓아 둘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물에 불어 부풀어 오른 책 상태를 보니 꽤 오랜 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낸 듯 싶다. 그렇다고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죽음에 대한 시들이 주류를 이뤘다. 신문을 보듯 뒤적 뒤적 시집을 군데 군데 읽었다. 그러다 발견한 84쪽과 85쪽의 시.
너무 야하다.
시로 인해 야함을 느낀 것은 김삿갓 스토리 이후 처음인듯 하다. 김삿갓이 방랑하다 과부집에 하룻밤 머물게 됐더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과부방에 <오늘 밤 옷벗기를 아까워 말라>라는 시를 던져 넣었다던가.
84쪽엔 <애액>이란 제목의 시가 85쪽엔 <첫날밤>이란 시가 널찍한 여백에 자리잡고 있었다.
<애액>
일찍이 네가 흘린 애액을 핥으며
넉넉히 배가 부르고
일찍이 네가 흘린 애액에 몸을 적시며
흠뻑 잠이 들었거니
여기에서 더 이상
무슨 공부를 만나랴.
<첫날밤>
첫날밤에서 벗어나면
너와 나, 다시는
첫날밤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
구태여 두 번째 밤을
찾으려 하지 말자
바람둥이라면 이 두 편의 시만 외우고 있어도 더이상의 작업멘트가 필요 없을 것 같다.
기억해 보니 시를 외워본 일이 수십년 세월 두부를 썰어 덜어낸듯 잘려 나가고 없다. 이 시도 아마 폰카로 찍어 휴대폰에 저장해 다니면 굳이 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꼭 외워야 겠다는 의지가 새삼 솟는 이유는?
본능 속 저 깊은 곳에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